1910년대 독립투쟁의 상징, 광복회 총사령 독립전쟁론에 의한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공화정을 추구 박상진은 1910년대 독립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박상진이 활동한 시점은 일제의 포악한 무단통치가 극성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독립운동의 모든 조직과 활동은 철저하게 비밀결사 형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1911년 그는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고국을 떠나 만주를 여행하며 신해혁명을 통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새로운 혁명을 계획하였다. 귀국 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동여관과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였고, 여관과 상점, 상회를 모임과 회의장소 및 연락기관으로 활용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1915년 7월 조선국권회복단의 인사들이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혁명단체인 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광복회는 국권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하고, 장차 도래할 무장투쟁을 위해 군대식 편제로 조직하였다. 총사령에 박상진, 부사령에 이진룡이 임명되었고, 기본강령을 비밀ㆍ폭력ㆍ암살ㆍ명령으로 정하였다.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 등 국내의 곡물상을 연락거점으로 군자금을 모으며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18년 대한광복회가 발각되면서 조직이 무너지고 박상진은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광복회 활동을 당당하게 여기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고자 소원하여,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구명활동을 벌이는 것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박상진은 만주를 주목하여 독립전쟁론에 의한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공화정을 추구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선구자적인 존재이다. 그에게는 친일파 처단 등 의열투쟁을 주도하였기에 의사라는 호칭이 타당하며, 어머니의 장례를 모시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어 나간 점에서 열사라는 호칭도 가능하다. 암흑의 1910년대에 누구보다도 일찍이 공화정을 꿈꾸었다는 사실에서 선생이나 미완의 혁명가라는 호칭도 어울린다. 더불어 광복회의 총사령으로 무장 투쟁을 계획하고 지휘하였기 때문에 장군이라는 호칭도 어색하지 않다. 이렇게 박상진에게 다양한 호칭이 가능한 것은 암흑의 무단통치기에 한 점 광명이 되어 3·1운동의 원천을 형성한 선각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