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독립과 통합에 바친 삶 김규식

민족의 독립과 통합에 바친 삶 김규식

  • 자 :이준식
  • 출판사 :역사공간
  • 출판년 :2016-12-09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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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내고 해방 정국에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 가운데 한 사람 지금 김규식의 이름과 활동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한국근현대사에 밝은 사람이 아니라면, 김규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못지않은 비중을 갖고 있으며, 독립운동 과정에서는 물론 해방 이후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적인 통일국가 수립을 지향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김규식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민족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한 뒤 죽을 때까지 민족의 독립과 통합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파리강화회의 대표,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해) 외무총장 및 학무총장, 구미위원부 위원장, 극동민족대회 한국 대표단 집행위원회 의장,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상무위원, 민족혁명당 주석, 대한민국임시정부(중경) 부주석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위원회 주석,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 의장 대리,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더욱이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의 이른바 ‘4김 회담’에 김구,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참석했다. 단결과 통합을 중시한 자주적인 통일국가 수립 지향 오직 독립과 통일을 위해 바친 삶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김규식의 활동무대는 유럽, 미국, 중국, 소련 등 세계 각지에 걸쳐 있었다. 해방 직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부주석이었고 해방 정국에는 미군정에 의해 정권 인수자로 지목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민족의 분단과 상잔을 막기 위해서라면 서울이든 평양이든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든 자주적인 통일국가 수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분단 체제를 전제로 한 단정 수립에 반대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구와 함께 평양행을 결행한 일 때문에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로부터 김일성의 계략에 놀아났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분단 체제의 반공 이데올로기 아래 김규식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일종의 금기처럼 되었다. 김규식은 열강과의 외교를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무장투쟁, 실력양성 등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김규식이 가장 중시한 것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이었다. 단결과 통합의 중시는 해방 이후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의 건설을 주장하고 점차 가시화되고 있던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단독 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독립과 분단 극복을 위해 일관되게 걸어온 김규식의 삶은 아직도 분단 체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독립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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