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나흘

  • 자 :이현수
  • 출판사 :문학동네
  • 출판년 :2013-05-16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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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데 돌아오는 아이도 있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옛날 그대로의 집으로.



“나흘 동안 이 작은 마을에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정갈한 문체와 깊이 있는 묘사로 시대를 자연스레 넘나들며 생의 날카로운 순간들을 꼼꼼히 수집해온 소설가 이현수의 세번째 장편소설 『나흘』이 출간되었다. 충북 영동 출신인 그는 이 장편소설에서 그동안 애써 말하지 않았던 고향의 아픈 과거를 펼쳐놓는다.

1950년 7월,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300여 명이 사살되었다. 당시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당한 피난민들은 철교에서 뛰어내려 노근리 쌍굴로 숨었으나 미군은 굴다리 앞 야산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쌍굴을 빠져나오는 양민을 차례로 쏘아 죽였다. 바로 한국전쟁 중 벌어진 뼈아프고 비참한 역사적 참극인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현수는 이 사건을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참혹함만으로 다루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도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심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물론 지루한 전쟁서사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이현수의 소설이 아닐 것이다. 마치 바로 옆에서 살아 숨쉬는 듯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푸진 사투리, 가끔은 정겹게 벌어지는 우습고 재미있는 상황들을 통해 우리는 감춰져 있던, 혹은 감춰왔던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며 이 이야기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소설 속 이야기는 내시가의 자잘한 일상부터 황간 지방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동학 혁명을 지나, 몰락하는 조선왕조와 한국전쟁에까지 다다른다. 이현수는 이토록 커다란 역사적 사실들을 소설 속에 어색하지 않도록 오밀조밀하게 배치하여 휴전 60주년인 올봄,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으나 아무렇지 않게 잊히고 있는 사실들을 집중 조명했다.





헝클어진 기억의 타래실을 함부로 잡아당긴 여자, 김진경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다큐멘터리 작가 ‘김진경’은 결국 황간역에 도착한다. 그녀는 이 지방의 유지인 내시가문의 딸이다. ‘내시가문의 딸’이라는 역설에 대한 사람들의 조롱, 그 꼬리표가 싫어 평생 고향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도망치며 살아온 진경은 노근리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라는 국장의 지시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귀향한다.



오랜 세월 바닥에 밴 담뱃진과 누런 벽지, 내가 예상한 요소를 골고루 갖춘 월류다방은 노인들이 사랑방처럼 죽치는 곳이었다. 못 보던 젊은 여자가 트렁크를 끌고 등장해서 그런지 다방 안이 일순 긴장하는 것 같았다. (10쪽)



무심코 들어간 고향의 다방에는 어느새 ‘다방아이’라고 불리던 초등학교 동창 ‘박윤자’가 어머니의 가업을 이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맘과는 다르게 자꾸만 자신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 고장이 진경에게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취재만 끝내면 곧장 떠나리라, 다시금 굳게 다짐해보는 그녀. 그러나 자신을 낳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면서 진경은 노근리 쌍굴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진실에 점점 더 접근해간다.



낡고 쇠락한 이 다리가 이야기로 은성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하던 노인들이 정작 숨긴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걸 알아내야만 한다. (31쪽)





내시가를 지키는 수문장, 김태혁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한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토록 거부했던 김태혁은 내시가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대부분의 일생을 살았다. 손녀인 김진경이 노근리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오랜만에 집에 온다는 소식에, 그도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절친한 사이였던 박기훈과 함께 지내던 날들, 쌍굴에서 벌어진 끔찍했던 일, 사촌인 태명과 태명 처, 그들의 딸인 채희의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인영…… 돌이켜보면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은 그에게서 많은 사람들을 앗아갔다. 이젠 진경에게도 진실을 말해줄 때가 된 것만 같다.



죽은 돼지를 파묻을 때마다 태명과 태명 처를 묻던 날이 생각나서 나는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생가의 사촌인 태명과 태명 처의 시신을 수습하며 어린 채희를 잘 키우겠노라고 맹세했었다. 타고 남은 시체 토막이 있을까봐 미친 듯이 잿더미를 파헤치던 그 밤, 실비가 내렸다. (88쪽)



찌는 듯한 여름날 오후엔 인영과 물 위에 누워 초강을 따라 하염없이 떠내려가곤 했다. 등을 맡긴 강물에 미역처럼 풀어지던 인영의 길고 풍성한 머리, 발치께에서 들리던 나른한 물장구 소리, 물을 먹어 귀가 먹먹한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생일선물처럼 떠 있던 새하얀 양떼구름들. (103쪽)





나흘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지켜본 미군, 버디 웬젤



버디 웬젤은 어제저녁부터 한국전쟁 때 다친 다리가 쑤신다. 가끔 찾아오는 아들녀석은 오늘도 그를 못마땅해한다. 하긴, 그의 못난 성격 탓도 크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왔는데도, 노근리에서 들었던 매미 소리가 그의 귓속을 떠나지 않는다. 치료를 받아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아내가 죽고 나서부턴 이유 없이 자꾸만 화를 내게 된다. 그래도 최근 인영의 딸 안나가 그를 찾아와 한결 편안해진 느낌이다. 그는 노근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이제 그 끔찍한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들은 내가 십 년 전에 출연한 BBC 다큐 얘기를 꺼냈다. 나 역시 그 방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BBC에서 방영한 노근리 다큐를 보는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노근리사건의 핵심 인물은 모두 죽고 주변 인물들만 나와서 저마다 지껄이는 꼴이라니. 박자가 맞지 않는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196쪽)



처음 맞닥뜨린 일방적인 전투, 하늘에서 퍼붓던 F-80 전투기의 요란한 폭격, 피란민의 외침과 절규 사이로 자욱이 덮이던 먼지, 그 여름의 미친 더위, 노근리 쌍굴에서 피란민과 숨 가쁘게 대치했던 삼박사일, 삶에도 컴퓨터처럼 삭제 키가 있다면 당장에 눌렀을 저주받은 나흘의 기억. (208쪽)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하던 노인들이 정작 숨긴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걸 알아내야만 한다.”



이 이야기는 한 여자의 자기 치유서사이기도 하다. 고향을 외면하며 살았던 김진경이 결국 자신의 근원을 아프게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소설은 노근리에 서린 어둡고 축축한 공기들을 꿋꿋하게 헤쳐나간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버지, 자신을 놔두고 자살한 어머니도 그녀의 삶을 불행하게 할 수 없다. 빈집의 꽃들은 저 혼자 피고 진다. 부모나 주인을 찾지 않는다.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 한 철을 나는 꽃들이 어쩌면 그녀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빈집의 꽃들은 허물어진 화단에서 저 혼자 피고 졌다. 나는 풀이 무릎까지 수북하게 자란 마당에서 일회용 봉지커피를 타 마시며 노근리 쌍굴을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다. 노을이 지면 마당의 풀들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드러눕는데 어떤 꽃도 폐가의 풀만큼 아름답진 않았다. _‘작가의 말’에서



나는 CAL30 M1919 기관총 사수였다. 제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했던 그것을 들고 노근리 쌍굴을 지날 때마다 묘한 기시감에 시달렸다. 쌍굴 벽의 무수한 탄흔이 다름아닌 내가 메고 있던 CAL30 실탄 자국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의 부대는 그곳에 있었고, 제대 육 년 후 나는 작가가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 뒤, 이현수 작가의 등단 현장에 내가 있었다. 그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도 왠지 대답해주지 않았다. 1999년 AP통신이 첫 보도를 했고, 2002년 BBC가 다큐로 조명했다. 이제 우리 소설 차례다. 마침내 이현수의 대답이 나온 것이다. 그곳에서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육십삼 년 전 7월의 ‘나흘’로 돌아간다. 그가 썼고, 내가 읽었다. 그가 얼른 대답해주지 않았던 아픈 까닭을 알았다. 이제 여러분이 읽을 차례다. _구효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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