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삿포로에선 절대 길을 잃지 않아!”
영화 〈탐정은 바에 있다〉를 탄생시킨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첫 번째 작품
80년대의 향수, 남자의 향기와 구수한 인정이 배어나는 신감각 하드보일드
총 12편, 20년간 인기와 명성을 이어가는 탐정 시리즈의 개막
함박눈이 내린다! 오늘도 ‘나’는 바에서 사건을 기다린다!
“여자친구가 행방불명이에요!”
“예쁘냐?”
“저는 좋아합니다.”
…… “거참 곤란하게 됐군.”
탐정 ‘나’는 삿포로 스스키노 거리의 명물 바 ‘켈러 오하타’의 오래된 단골이다. 어둠이 내리면 ‘나’는 코트 깃을 세우고 어지러운 골목을 돌고 돌아 바에 들어선다. 바텐더는 시키지 않아도 위스키 스트레이트 더블과 위장약 상자, 물 채운 텀블러를 재빠르게 가져다준다. ‘나’는 위장약 두 봉지를 눈 깜짝할 사이에 입안에 털어 넣고, 위스키를 몸속에 흘려 넣으며 밤의 분위기에 서서히 녹아든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어디선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전화’가 걸려오길 기다리며 다섯 잔, 여섯 잔…… 탐정은 꼭지가 식지 않도록 술로 자신을 데워준다. 홋카이도 대학교 중퇴, 스스로 교양 있고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글쎄? 이 거리의 사람들은 그와 야쿠자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는 야쿠자를 남을 등쳐먹고 사는 ‘거지’라고 무시하고 자신과 그들의 옷차림이 매우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글쎄? 이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구별해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야쿠자가 친구 먹자고 덤벼든다.
‘나’는 오늘 밤 이 바에서 아주 성가신 사건 하나를 접수한다. 자신감 없어 보이는 대학 후배의 집 나간 여자친구 찾아주기. ‘나’의 머릿속에는 싫어서 떠나는 여자와 그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겹쳐지는 영화의 라스트 신이 떠오르지만, 호기심 반 동정 반으로 어수룩한 후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이 일이 후에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연결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한 채…….
독특하다! 삿포로발 유머 하드보일드 액션
아즈마 나오미의 장편소설 『탐정은 바에 있다』는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약 20년간 12편이 출간된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2011년 9월에 개봉한 영화 〈탐정은 바에 있다〉는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바에 걸려온 전화』의 내용으로 만들어졌다.
홋카이도 삿포로에 사는 탐정이 대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비정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나가는 내용의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는 영화 제작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고, 개봉 이후 이 시리즈 전체가 서점 진열대를 도배하다시피 하는 진풍경을 만들어냈다. 팬들의 성원에 영화 역시 후속편이 제작될 예정이어서 당분간 이 열기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탐정 ‘나’는 뛰어난 관찰력과 예리한 판단력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나가기……보다 수상하다 싶은 일에 앞뒤 안 가리고 일단 고개부터 들이밀고 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표적이 되어 난데없이 두들겨 맞거나 쫓기거나 한다. 티격태격 난투극을 벌인 뒤, 탐정은 집으로 돌아와 아프고 쑤시는 몸을 달래가며 사건의 고리를 이어 맞춘다. 그래서 그의 밤은 언제나 고달프다. 가끔은 깜빡 정신을 잃고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주위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발딱 일어나 “끽해야 오 초쯤 쓰러졌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친다! 이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지만 ‘미인’에 대한 ‘경배’만큼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삿포로의 ‘미인’은 모두 다 안다고 자부하는 스물여덟 살의 애늙은이 탐정 ‘나’가 활약하는 유머 하드보일드가 바로 『탐정은 바에 있다』이다.
조금 옛날, 풍속영업법이 바뀌기 전에 ‘소프랜드’가 ‘터키탕’이라고 불리고 에이즈가 미국의 호모들만 걸리는 원인불명의 희귀병이던 무렵, 나는 스스키노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9쪽
이 소설은 1980년대 초반, 정확히는 1983년 말부터 1984년 초를 배경으로 한다. 공간적 배경은 도쿄 이북에서 최대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삿포로의 스스키노. (‘스스키노’는 원래 행정지명이 아니라 이 번화가에 붙여진 별칭이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전이었고, 에이즈의 공포가 세상을 뒤흔들던 때였다. 거나하게 취한 술꾼, 호객꾼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청춘남녀가 차가운 밤공기를 흡입하며 유쾌하게 활보하는 유흥의 거리. 그런데 이 거리의 분위기가 독특하다. 이 거리에는 술집과 사우나와 미용실과 오락실과 사무실과 주거용 공간, 요컨대 먹는 곳, 노는 곳, 쉬는 곳, 자는 곳이 모두 한데 모여 있는 잡거빌딩이 많아서 집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방금 사우나를 마친 얼굴 빨간 아저씨와 마주치기도 하는 특별한 생활문화가 깃들어 있다. 주인공 ‘나’ 역시 이러한 빌딩에 거처를 마련해두고 욕조에 물을 받는 사이 1층으로 내려가 샌드위치를 먹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간편한 생활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의 일과는 위스키+샌드위치(아침) → 사건 접수(점심) → 바에서 술(저녁) → 사건 수사(밤) → 다시 바에서 술(늦은 밤) 식으로 무척이나 규칙적이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하고 ‘켈러’의 성냥갑을 놓았다. 여기로 전화하면 반드시 나에게 연락이 닿는다. 무슨 일이 생기면 힘이 돼주겠다고 말했다. 154쪽
왁자하고 독특한 번화가의 뒷골목에 있는 한적한 바에서 자신을 찾는 전화를 기다리며 위스키를 홀짝이는 탐정 ‘나’와 비정한 거리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사건들의 조합. ‘스스키노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차가운 하드보일드의 냄새를 풍기면서도 흘러간 시대의 향수, 유머와 수다스러운 요설이 넘치는 내레이션으로 독자를 웃음 짓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1992년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행간에는 요즘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유머가 반짝이고 캐릭터 조형도 세련됨을 갖추었다. 출간 당시 유례없던 이 유머러스한 하드보일드 문학에 평단에서도 당황했으나 2011년 유머 미스터리의 붐과 영화 개봉이라는 호조에 재조명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으니, 아즈마 나오미는 시대를 앞서가는 유연한 센스를 가진 작가였음이 분명하다.
세심하게 공들여 다듬은 주인공 캐릭터는 개성 있게 빛을 발하면서도 주변 인물들과 절묘하게 어울리고, 특히 두 친구――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투덜대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오른팔이 되어주는 가라테 유단자 대학원생 ‘다카다’와 신문기자 ‘마쓰오’――와 탐정의 호쾌하고 기운 넘치는 일상의 대화는 이 소설에서 단연 돋보이는 유머 코드로 독자를 웃게 만들어준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사라진 한 여대생의 행적을 추적해가면서 인간이 인간을 돈을 버는 도구로 경시하는 세태를 고발하고,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숫자’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시니컬하게 꼬집는다.
사라진 ‘여자’를 찾아라, 비정하고 적나라한 뒷골목 스토리
눈 내리는 삿포로. 탐정의 머리 위로, 거리 위로, 강 위로 눈이 날리고, 탐정은 사라진 여대생을 찾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집 나간 여자가 남긴 예금통장과 특정일자의 신문들, 이 귀찮은 사건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탐정의 발목을 붙드는 것은 여자의 아버지가 남긴 “건강히 잘 지내라”라는 편지와 딸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어머니가 남긴 “우리 딸 지내나요?”라는 통화 음성. 여대생의 실종이 그즈음 한 호텔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한 탐정은 사건의 중심인물과 주변 인물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후 탐정이 쑤시고 누비고 다니는 길목 길목에서 난데없는 떼거리들이 몰려와 주먹부터, 아니 발차기부터 날린다. 껄렁껄렁한 소년소녀단, 검정 가죽바지를 입은 남자와 그 떨거지들, 스스키노에서 이름난 클럽녀의 정부와 그의 떨거지…… 하나같이 죽자 살자 덤벼들어 탐정을 아프고 멍들게 만든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고 가출한 여대생까지 찾아내지만, 탐정은 사소한 실수 하나로 또 다른 미궁에 빠지게 된다. 목구멍에 걸린 가시같이 떨어지지 않는 찜찜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탐정은 또다시 거리로 나서고, 삿포로의 어두운 하늘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