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과 사랑에 빠진 사무원, 유방암에 걸린 아버지, 내 애인을 사랑한 고양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처절한 욕망과 진심에 관한 이야기
영수증 처리 담당 직원, 갈빗집 사장님, 청첩장 디자이너, 기업의 CEO, 출판사 편집자, 인터넷서점 북에디터…… 각각의 단편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자신의 직업, 업무, 역할이 매개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고백을 하는 대신 그가 제출하는 영수증을 수집해 그의 일상을 복원하고(「아주 보통의 연애」), 자신의 가족을 만드는 대신 고객의 결혼식에 가서 결혼사진에까지 끼어들거나(「청첩장 살인사건」), 직접 소설을 쓰는 대신 다른 사람의 작품을 교정하고 편집한다(「강묘희미용실」). 주변 사람들 역시 그들의 직업 선택이 아주 당연한 것이라는 듯 일반화시킨 뒤 안도해버리고 말 뿐이다(「고양이 샨티」).
생계 유지의 수단이자 자아 성취의 수단인 직업이 도리어 그들의 ‘자아’를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안으로 꽁꽁 숨겨둘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아이러니. ‘직업’이라는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초라한 모습의 자아가 고스란히 드러나버리고 말 것 같아서 주저하기도 하고, 때론 패닉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끝내 이들이 선택하는 것은 참된 자아와 마주할 ‘용기’, 바로 그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직접 음료수를 건네고(「아주 보통의 연애」), 결코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았던 헤어진 아내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보고(「육백만원의 사나이」), 여행기를 읽으며 대리만족 하는 대신 직접 차를 끌고 발길 닫는 대로 여행도 떠나보고(「강묘희미용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가족 드라마」). 이렇게 이들이 내딛는 작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그런 시도를 해보는 인생이야말로 소중한 것이라는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작품 한 편 한 편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진중함과 깊이 있는 통찰력은 작가 특유의 유쾌한 문장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재능이 넘치는 이 젊은 작가가 앞으로 또 어떤 매력적인 이야기로 독자들을 찾아올지, 벌써부터 작가가 들려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아주 보통의 연애
잡지사 관리팀 직원 ‘나’ 김한아는, 한 인간의 모든 욕망을 그가 사용한 영수증을 통해 해독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내가 짝사랑하는 패션팀 수석 ‘이정우’의 삶 역시 그가 나에게 제출하는 영수증으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영수증을 몰래 복사해 차곡차곡 모아둔 노트는 그를 향한 나의 마음 그 자체이다. 어느 날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나를 이태리 식당으로 데려간 이정우는 실은 자기가 반지 영수증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는데……
육백만원의 사나이
세금은 세무사가, 양육은 아내가, 소송은 자문변호사가, 결혼기념일 선물과 애인에게 줄 선물은 비서가 골라주는 자신의 삶이 합리적이고 능률적이며 탁월한 것이라고 자부하며 살던 ‘나’에게 갑자기 ‘파산선고’와 ‘루게릭 병’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망가져버린 삶을 정리하는 방법은 안락사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합법적인 안락사가 가능한 취리히로 가고자 하지만, 내 수중엔 돈 한 푼 없고, 가족은 떠나고, 내가 살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에 빠지는데……
청첩장 살인사건
이번 연쇄강도살인사건 피해자들의 사진입니다. 여기 동그라미를 친 사람들이 피해자고. 이 결혼식 사진들 속에서 아주 이상한 공통점이 발견됐어요. 피해자는 전부 혼주들이고요, 혼주들은 예식이 있던 며칠 전부터 미행당했고, 범인들은 혼주들의 동선을 미리 파악했던 걸로 예상됩니다. 당신이 죽인 거지?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이 결혼식 사진 속에 당신이 있는 거야? 대체 남의 결혼식장에는 왜 가서 사진까지 찍고 온 거야?
가족드라마
갈비와 냉면을 모두 잘 만드는 주방장도, 불판을 반짝반짝 닦아주는 불판 담당도, 맛깔나는 반찬을 담당하는 찬모도, 모두 아빠의 ‘낡은 수첩’ 하나만 있으면 금세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빠가 가출을 하고 난 후의 일이다. 그런 아빠에게서 받은 난데없는 편지 한 통에는, 아빠가 바람이 나 엄마 몰래 살림을 차렸고, 암에 걸려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고, 그것도 ‘유방암’(!)에 걸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방암? 진짜 유방암? 나는 대체 이 사실을 우리 가족에게 어떻게 고백해야 하나……
강묘희미용실
작가를 대신해 전화를 받고, 작가의 말을 대신 전하고,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을 고치고, 작가가 되는 대신 작가를 보필하는 ‘편집자’라는 직업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회의를 느끼게 되는 ‘나’는 내 이름을 인터넷 검색창에 쳐본다. 이름 석 자를 다 치기도 전에 자동으로 검색되는 유명 작가의 이름이 아닌, 강묘희, 내 이름 세 글자를. 아무것도 검색되지 않으리란 예상은 빗나갔다. 그곳엔 낯선 상호명 하나가 떠 있었다. 강묘희미용실. ‘나’는 충동적으로 미용실 주소를 적어놓고, 충동적으로 그곳을 향해 떠나는데……
푹
대학병원 교수 임용에 떨어진 첫번째 피해자는 왼손 네번째 손가락을 절단당했다. 와이프가 임신중인 두번째 피해자는 오른손 약지가 잘려나갔다.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세번째 피해자는 약혼반지가 끼워진 오른쪽 손가락을 잘렸다. 전문 몽타주 요원인 ‘나’는 그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용의자의 몽타주를 그려나간다. 몽타주가 점점 윤곽을 드러낼수록 ‘나’는 점점 이 용의자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순간이 두려워졌다. 분명, 이 얼굴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았던가.
미라
미라와 내가 진짜 연애를 하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미라 같은 상상력 과잉의, 정신상태 복잡한 여자와 말이다. 그래도 미라는 어쩔 수 없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미라는 언젠가부터 새벽 세시마다 전화를 걸어와 자신이 태몽을 꾼 게 틀림없다고, 분명 임신을 한 거라고 소리를 지른다. 미라가 평소부터 임신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던 것을 알고 있던 나는 하품을 하며 그저 정신과 상담이나 받아보라고 대꾸해버리고 말았다. 그후로 미라는 내게 더이상 연락을 해오지 않았고 자취마저 감춰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보건소에서 전화가 걸려오는데……
고양이 샨티
2006 문학동네신인상 당선작. 인터넷서점 북에디터로 일하는 ‘나’는 죽은 약혼자의 곁을 분신처럼 맴돌던 페르시안 암컷 고양이 ‘샨티’를 키우며 아직 마음속에서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연인의 체취를 느낀다. 어느 날 새벽 한시, 신경질적인 벨소리, 쿵쾅대며 현관문을 발로 걷어차는 소리에 잠이 덜 깬 채로 현관을 내다보니 2002호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 쓰레기봉투 돌려주세요, 제발!”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