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문학, 표현주의 미술, 부조리 연극 등
현대 예술의 모태가 된 카프카 문학의 정수
50년 만에 부활한 정통 세계문학
을유세계문학전집
을유문화사가 새로운 세계문학전집을 내놓았다. 올해로 창립 63주년을 맞은 을유문화사가 국내 최초의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하기 시작한 지 50년 만이다. 1959년에 1권 『젊은 사자들』로부터 시작하여 1975년 100권 『독일민담설화집』을 끝으로 100권으로 완간된 을유세계문학전집은 다수의 출판상을 수상하며 한국 출판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새로운 을유세계문학전집은 기존의 을유세계문학전집에서 재수록한 것은 한 권도 없고 목록을 모두 새롭게 선정하고 완전히 새로 번역한 것이다. 매월 2~3권씩 출간되며, 올해 말까지 16권, 2020년까지 300권이 출간될 예정이다.
이번에 을유세계문학전집의 제16권으로 출간되는 『소송』은 카프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현대성의 본질을 통찰하고 현대적인 문제의식을 처음으로 드러내며 20세기 현대 문학의 서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소설이다. 이 책을 번역한 이재황 서울대학교 독문과 강사는 카프카의 『변신』을 포함해서 다양한 독일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고 관련 연구 논문을 집필하였으며 이 작품에서 카프카의 원본에 근거한 비평판본에 따른 충실한 번역을 선보였다.
현대성의 본질과 운명을 통찰한
소외와 부조리 문학의 선구자 카프카의 대표작
“모든 것을 제시하지만 아무것도 확증하지 않는 것이 『소송』의 운명이자 위대함이다.”
- 알베르 카뮈
『소송』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 체제의 형성과 과학 기술의 혁신적인 발달을 향한 20세기의 여명기에 현대성의 본질을 통찰하고 인간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문제 의식을 투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더 이상 인과율의 법칙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불투명한 현대 세계와 이질적이고 모순적이며 다층적인 인간 주체에 대한 이중의 인식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린다는 점에서 20세기 현대 문학의 시원(始原)이 되고 있다. 카프카의 독특하고 불완전한 작품 세계는 카뮈의 『이방인』과 사르트르의 『구토』 등 실존주의 문학뿐만 아니라 표현주의 미술, 해체주의 철학, 부조리 연극 등 20세기 현대 예술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은 기계 문명에 의한 인간의 자기 소외와 총체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세계가 대립하는 위기 속에서 개인이 무기력하게 파멸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대인을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해 일체의 관계를 박탈당한 채 고독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세상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20세기 현대 문명의 근본적인 화두를 던진다.
카프카는 이 작품에서 악몽과 같은 비인간적이고 관료적인 세상에서 인간 존재의 불안감을 표현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비리, 모순, 부조리, 수수께끼, 미궁으로 대표되는 문제적 현실 상황에 조응하는 현대 소설의 전형적 인물인 ‘문제적 주인공’이며 ‘불안한 영혼’을 포착한다. 이 작품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더불어 20세기 독일어권 문학의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은행 차장인 요제프 K는 30세 되는 생일날에 두 명의 감시인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체포된다. 그는 처음에는 은행 동료들의 장난이나 잘못된 행정 집행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법정 심리에 참여하고 변호사나 관계인을 찾아 다니면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결국 갑자기 찾아온 사형 집행인들에 의해 잡혀 가는데......
『소송』에서 주체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기술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통일적으로 기술할 수가 없는 이중의 무능 상태가 된다. 세계는 주체의 내면 속에 주체 자신과 마찬가지로 왜곡되고 과장된 상들로 해체되어 반영되며, 그러한 현실의 묘사는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사건들의 뒤얽힌 연속으로 변형됨으로써만 가능하게 된다. 인과적 연관성과 합리적 설명가능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카프카 문학의 형상들은 그와 같은 문제의식과 이중적 무능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내용적 차원에서 무엇보다도 ‘죄’의 문제를 근본적인 물음으로 제기하고 있다. 존재 자체가 곧 ‘죄’이며,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죄’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몸을 가지고 현실 속에 실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그 실존적 상황은 필연적으로 ‘죄’를 초래하고, ‘죄’는 곧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다. ‘죄’의 개념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 보다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 인간의 본질적 존재 양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책은 원본의 구성과 체제를 최대한 유지한 맬콤 패슬리의 판본(Franz Kafka, Der Prozess, Kritische Ausgabe, herausgegeben von Malcolm Pasley(Frankfurt/M.: S. Fischer, 1990))을 기본으로 하고 막스 브로트 판본을 참고로 삼았다. 막스 브로트 판본은 미완성의 느낌을 주는 요소들을 배제하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원본 텍스트 전반에 손질을 가하였다. 이에 반해서 카프카 작품의 비평본인 패슬리 판본은 작가의 의도를 살릴 수 있도록 원본의 구성과 체제를 최대한 반영하고 정서법과 구두법도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