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훈제 선생의 육필 자서전으로 당시 검열되어 삭제된 부분을 되살려 놓아 의미가 크다. 흰고무신이 상징이었던 계훈제 선생의 삶과 사상을 읽어 볼 수 있다.
이제 나는 가야 한다. 온갖 허물을 몸과 마음에 새겨 놓은 채 하나도 풀어 보지 못하고 가야 한다. 누더기 셔츠를 벗어 던져야 하는데 알몸이 헌 것을 어찌하랴. 새로 나려고 애쓴 것만이라도 초월자는 기억하여 주소서. 저곳이 가까웠는가. 하나도 준비 없이 가야 하나.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못 된다. 그럴진대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세상이 그어 놓았던 줄을 깬 것이다.
-본문 중에서
1921년 12월 31일 평북 선천 부황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40년대 일제 시기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4ㆍ19 시기에도 직간접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60~1961년 국학대 강사로 있는 한편 교원노조를 결성하고, 1962년에는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자유언론수호협의회'를 결성하였다. 1969년에 삼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운영위원, 1970~1979년 『씨알의 소리』편집위원, 1973~1974년 구화고등학교 교장 및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을 지냈으며,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1977년 민주주의국민연합 운영위원을 역임하고, 1980년 '민주화의 봄' 시기 이후 내란 음모 사건 관련으로 투옥되었으며,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1985년 민통련 부의장, 1986년 민통련 의장대행을 맡아 1987년 6월 항쟁을 선언한 성공회 농성을 주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89년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1995년 고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행사 준비위원을 맟았으며, 1999년 3월 14일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책 발간에 부쳐
신화 같은, 아 신화 같은
그는 한 켤레 고무신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소나무 한 그루
제1부
아직도 꿈에 보이는 그 얼굴, 아버지
신성학교 회고
일제 말엽의 대가쟁명(大家爭鳴)
학도 징용과 조선민족해방협동당
서울 가는 길
피난 길에서
제2부
송영(送營) 유감
공존의 생리
소신과 귀머거리
함석헌 선생의 저항과 나
장준하 선생이 묻히는 날
연두 기자 회견
어느 저항인의 하루
삼자 회담과 통일
농촌과 농협
제3부
'서울의 봄', 그리고 도피 생활
우리 시대의 지도자상
복간 유감
참 민주주의
육필 일기
'흰 고무신'의 불가사의: 계훈제 선생의 삶과 사상 / 장기표
계훈제 선생연보